◆ 이름 없는 수프 "저기 말이야, 연인이라는 거는 여차할 때 아무 도움이 안 돼. 이건 정말이야. 하지만 맛있는 수프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면 어느 때나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지. 이것이 내가 찾은 진실 중의 진실이지. 그러므로 무엇보다 레시피에 충실하게 만드는 게 중요해." (p.162)
두 량짜리 노면전차가 천천히 지나는 작은 마을, 역에서 뻗어 나온 상가에는 오래된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상가 끄트머리에는 '트르와'(프랑스어로 3)라는 꽤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 <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 > 는 영화 대본을 쓰고 싶은 생각에 덜컥 직장을 그만둔 오리(大里)라는 청년이 트르와에서 일하게 되고 샌드위치에 어울리는 수프를 만들면서 사람들과 관계 맺어가는 과정을 느린 속도로 그리고 있다.
수프는 샌드위치의 맛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것만으로도 다른 건 필요 없을 정도로 맛있어야 한다. 오리는 선망하던 단역 여배우 아오이 씨에게 수프 만드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모두가 감탄하는 맛의 수프를 만들어낸다. 그 수프는 맛을 본 사람들에게 각자 '어머니의 맛'을 상기시키고 기억 속의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서로 다른 개성과 다른 추억을 갖고 있음에도 누구나 똑같이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맛의 진실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우리는 저마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수프'를 끓이고 그 수프가 식기 전에 함께 나누는 동안, 관계에는 깊이가 더해진다.
그래서 맛있는 수프를 만드는 법은 '관계의 레서피'이기도 하고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는 관계에 관한 은유로 생각할 수 있다. 너무 뜨거워 혀를 데거나 차갑게 식어버려 밋밋한 것이 아닌, 딱 먹기 좋게 적당한 온도-그 따뜻한 농밀함. 어울리되 서로의 맛을 방해하지 않는 샌드위치와 수프처럼 조화를 이루고 배려하며 처음의 따뜻함과 설렘이 유지되는 거리 말이다. 소설 말미에는 '이름 없는 수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대로 하다 보면 각자 자기만의 수프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여러 번 맛보며, 최대한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