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계절 겨울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며 마음밭을 일구기 좋을 때입니다. 가을걷이 틈틈이 몸과 마음의 양식이 되어줄 먹을거리와 읽을거리를 넉넉하게 장만해 놓으면 다가오는 추위는 불편이 아니라 자신과 만나는 오붓한 시간이 됩니다. 소한 추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동지 추위도 만만치 않습니다. 들녘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가 귓전에 웅성거리면 스산한 마음이 일었다가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 한 그릇 떠올리면 어깨가 쭉 펴지고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음식과 몸의 상관관계란 그런 재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가 지나면 해는 노루꼬리만큼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동짓날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떡국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먹는 것과 같은 의미로 예전에는 동지를 아세(亞歲)라 해서 새해에 버금가는 날로 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동지팥죽은 팥의 붉은 색이 부정과 잡귀를 물리쳐준다는 의미도 담고 있어 절식으로 먹지만, 삼갈 때도 있습니다. 동지는 대개 양력 12월 중순경, 음력으로는 11월 중순이 되는데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라 부르며, 애동지 팥죽을 먹으면 어린아이들이 병에 잘 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 때문에 팥죽 대신 팥시루떡을 먹습니다. 지난해 동지가 애동지라 팥죽 없는 동지를 맞는 집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팥죽은 동짓날 외에도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 죽을 쑤어 부조하기도 하고 생일날 먹는 팥밥, 집들이에 준비하는 팥죽, 고사떡이라고도 부르는 팥시루떡 등 경사스러운 일에도 팥죽ㆍ팥밥ㆍ팥떡을 해 먹습니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이야기는 크게 실감나지 않아도 팥은 풍부한 영양으로 몸을 이롭게 하는 먹을거리입니다. 현대인들 생활습관에서 빚어지는 성인병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되고,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해주며 피로를 풀어줍니다. 더불어 이뇨작용으로 붓기를 빼주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서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항산화 효과로 노화를 방지해주는 등 여러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기온이 낮고 활동량이 적은 겨울엔 혈액순환 장애로 소화기능이 둔해지기 쉬운데 이럴 때도 팥을 적절히 활용하면 좋습니다.
영양이 풍부한 팥은 심고 가꾸기도 쉽고 소출이 많아서 무척이나 반가운 작물입니다. 산골 밭에 자라는 여러 콩과식물 중에 수확량은 팥이 가장 많습니다. 약간 길게 자라는 줄기는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풍성하게 형성되어 자생초 시달림이 거의 없고, 병충해에도 강한 편입니다. 그러나 때 이르게 심으면 영그는 시기가 고르지 않고 결실도 부실해집니다. 꼬투리가 여물면 저절로 비틀어지면서 알이 터져나가기 때문에 일일이 거두자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닙니다. 처음 팥을 심었을 때는 들쑥날쑥 여무는 꼬투리 따느라 어지간히 밭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뽕나무 열매 오디가 농익어갈 때부터 하지 무렵까지, 약간 늦는다 싶게 심으면 알뜰하게 거둘 수 있고 갈무리하기도 간편합니다. 적당한 시기에 줄기째 잘라서 말린 후 탁탁 두드려주기만 하면 보기에도 어여쁜 팥알이 우르르 모여듭니다.
팥죽은 검정팥으로 쑤어도 되지만, 색에 담긴 의미도 새기고 색감도 곱게 살리려면 붉은팥이 낫습니다. 팥과 멥쌀, 찹쌀 등 곡류가 주된 재료라 한 번에 뚝딱 만드는 음식에 비해 번거롭긴 해도, 팥죽처럼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슬로우 푸드는 맛이 깊고 가족과 이웃끼리 나누면 주는 마음 받는 마음 다 같이 훈훈해집니다.
팥을 삶을 때는 첫 번 삶은 물은 따라내고 새로 물을 붓고 삶아야 떫은맛이 사라지고 먹었을 때 속이 편안합니다. 시간을 좀 줄이려면 압력솥을 이용하고, 물은 줄어드는데 충분히 익지 않으면 물을 보충해가며 끓입니다. 찹쌀반죽은 반드시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합니다. 익히는 과정에서 자칫 풀어지기 쉬운데 익반죽은 한 번 익혀주는 효과를 내어주어 원형 그대로 모양을 유지하기가 좋습니다. 찹쌀가루에 남은 수분을 감안해 물은 조금씩 넣어가며 손으로 치대어주고, 새알심을 미리 빚어 놓았다 끓이면 덜 풀어집니다. 좀 더 탱탱하게 하려면 끓는 물에 익혀서 찬물에 담갔다 건져 멥쌀이 푹 퍼지면서 충분히 익었을 때 새알심을 넣고 조금만 저어주면 됩니다.
직접 심어 거둔 팥으로 죽을 끓여보면 은근한 단맛에 반합니다. 제맛을 잘 살리려면 소금으로 심심하게 간을 하고 설탕은 넣지 않습니다. 그래야 팥의 자연단맛과 현미의 구수한 맛이 살아나면서 뒷맛도 개운해지고, 새알심 없이 팥에 멥쌀만 섞어 죽을 끓여도 겨울철 별미로 그만입니다.
팥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팥죽 끓일 때처럼 앙금을 가라앉혀 끓인 국물에 쌀 대신 국수를 삶아내면 팥칼국수, 수제비를 넣어 끓이면 팥수제비가 되는데, 국수를 좋아하는 식성 때문인지 팥죽보다 손국수를 넣어 끓인 팥칼국수가 더 맛이 납니다. 고슬고슬하게 삶은 팥은 시루떡은 물론 팥고물 경단, 팥고물 인절미를 만들고, 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삶아서 케이크 반죽에 섞거나 웃고명으로 올려주어도 맛과 멋이 돋보입니다. 통팥 그대로 국물을 자박하게 해서 달게 조리면 붕어빵앙금과 빙수 팥을 만들기 좋고, 보송보송하게 삶아 으깨면 빵에 넣을 수 있는 앙금 등 맛깔스러운 간식 만들기에 좋습니다. 추운 계절 실내온도도 높이고 마음에 온기도 더해지도록 손맛과 정성을 담아보세요.
재료 준비4인분
붉은팥 2컵, 현미 멥쌀 1/2컵, 물은 팥의 8~9배, 소금 1/2큰술
새알심 : 현미 찹쌀 1컵(가루 2컵), 뜨거운 물 3~4큰술, 소금 2/3작은술
만드는 방법
01 멥쌀은 2~3시간 물에 불려 씻어 건지고, 찹쌀은 하룻밤 정도 불렸다 씻어 건져 물기가 빠지면 분쇄기에 곱게 갈아준다. 백미는 불리는 시간을 조금 짧게 한다.
02 팥은 씻어 건져 푹 잠기게 물을 붓고 삶아서 부르르 끓어오르면 물만 따라낸 다음 팥의 8~9배 물을 붓고, 팔팔 끓기 시작하면 중약불로 줄여서 팥알이 퍼지게 푹 삶는다.
03 팥을 삶는 동안 찹쌀 반죽을 한다. 소금을 넣고, 뜨거운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되기를 맞추고 매끄럽게 치대어 지름 2㎝가량 크기로 동그랗게 새알심을 빚는다.
04 팥이 충분히 삶아졌으면 체에 받쳐 팥물은 따로 받고 주걱으로 팥을 곱게 으깨어 체에 내린다. 팥이 절반쯤 줄어들면 팥물을 부어가면서 앙금을 꼼꼼하게 걸러낸다.
05 받아놓은 팥물에 앙금이 가라앉으면 웃물만 따라내 끓이다가 불려놓은 멥쌀을 넣어 쌀이 푹 퍼지면 앙금을 넣어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이고 소금으로 짜지 않게 간을 한다.
06 새알심을 팔팔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담갔다 건져 팥죽에 넣고 가볍게 저어가며 조금만 더 끓인다.
글을 쓴 자운(紫雲)은 강원도 횡성으로 귀농하여 무농약ㆍ무비료 농법으로 텃밭을 일구며 산다. 그녀 자신이 현대병으로 악화된 건강을 돌보고자 자연에 중심을 둔 태평농법 고방연구원을 찾아가 자급자족의 삶을 시작했던 것. 건강이 회복되면서 직접 가꾼 채소로 자연식 요리를 하는 그녀의 레시피는 블로그 상에서 인기만점이다.
http://blog.naver.com/jaun000월간 < 전원속의 내집 > 의 기사 저작권은 (주)주택문화사에 있습니다. 무단전재, 복사, 배포는 저작권법에 위배되오니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