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수육 김치말이+빈대떡… 어느새 빈그릇천생이 평양 사람인 내 할아버지는 생전에 겨울냉면이 더 맛있다고 하시었다. 평소에도 메밀 발 뚝뚝 끊기는 평양 물냉면을 이삼 일이 멀다 하고 드셨고, 추운 겨울이 와도 냉면 사랑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마냥 어리기만 했던 나로서는 가뜩이나 추운 날, 또 냉면을 먹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입맛을 이해할 수 없었고.
■ 찬 국수와 따뜻한 수육겨울이면 냉면이 더 맛있다고 하셨던 할아버지를 아직 이해할 수 없었을 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7년이라는 세월이 달리는 말처럼 가버려 나는 20대에서 30대로, 미혼자에서 기혼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30대의 반을 보낸 이 겨울,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콩국수, 평양냉면, 함흥냉면을 번갈아 먹고 있다.
이래서 핏줄이 질긴 것이라 얘기들 하나보다. 올 겨울 찬 음식을 자주 먹다 보니, 할아버지가 늘 냉면에 따끈한 접시만두를 곁들이시던 것도 생각이 난다. 자연스레 나도 만두 반 접시, 같이 먹는 사람이 두엇 더 있으면 수육 한 접시를 따끈하게 곁들이곤 하게 된다.
4호선의 종점인 당고개역. 당고개는 이제 아파트 단지 빼곡한 전형적인 도심의 분위기지만, 옛날에는 그저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한적한 고갯길이었단다. 당고개를 1968년부터 지키고 있는 '당고개 냉면'에 들어서면, 당고개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사진이나 글귀를 만나게 된다.
야들하고 가녀린 면발에 너무 질척하지 않은 칼칼한 양념이 옛날 맛을 완벽히 만들어내는 이 집의 비빔냉면은 특히 맛있다. 식초 조금 넣고 살살 비벼 입에 넣는 순간, '아, 옛날 맛!'하는 감탄이 나온다.
호주산 사태로 만든 수육과 국내산 오겹살로 깔끔하게 익힌 제육 등 두 개의 고기 메뉴 가운데, 나는 특히 얇게 썰어 담백한 수육을 비빔냉면에 곁들이는 것이 맛있다.
잘 비빈 맵고 찬 국수를 따뜻한 고기 한 점으로 쌈 싸듯 감싸서 입 안 가득 밀어 넣으면 맵고 담백한, 그리고 차갑고 따뜻한 맛의 밸런스가 딱 맞는다. 추운 날, 다리가 긴 서양식 테이블 말고 안쪽 방으로 들어가 신 벗고 앉아 수육으로 감싼 비빔냉면을 가득 물고 우물거린다.
고개 돌려 창 밖을 내다 보면, 철컥 철컥 천천히 들고 나는 4호선 열차가 눈앞을 스친다. 종점을 지나는 열차답게 여유가 만만하니 운치가 있다. 냉면 집 벽면에는 '한겨울, 구들장에 앉아 냉면을 먹으며 쌓인 눈이나 고드름을 바라보는 멋'에 대한 예찬이 적혀 있어 감상에 빠진다.
■ 찬 물김치와 따뜻한 빈대떡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입맛은 이북식으로 먹는 '김치말이'로 이어진다. 추울수록 쨍하게 이가 시린 찬 음식을 좋아하는 이북 입맛은 겨울에도 어김없이 물김치를 찾는데, 그래서 연말 연초를 앞둔 우리 집은 늘 알맞게 익은 물김치가 있었다.
빈대떡이랑 보쌈김치, 손으로 빚은 큼직한 만두를 먹고 입가심은 늘 김치말이로 하는데 차가운 물김치와 기름을 걷은 찬 육수를 섞어 농도를 조절하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이렇게 준비된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온기가 남아 있는 빈대떡을 넣어 푹푹 깨뜨려가면서 한데 먹어야 제 맛. 이가 시리게 쨍하니 익은 물김치와 밥과 기름기 살짝 도는 빈대떡을 한 입에 먹어야 "재은 에미가 요리 솜씨 하나는 끝내주누나, 야."라는 할아버지의 감탄사가 따라 나오곤 했다.
어릴 적부터 김치말이 마니아였던 남동생과는 달리,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손도 대지 않던 메뉴가 김치말이다. 사실 물김치는 물김치, 밥은 밥, 빈대떡은 빈대떡대로 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데 넣어 버무려 먹는 김치말이는 입 안의 행복도 넘치게 만들지만, 할아버지의 젊은 날과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우리 집안의 '소울 푸드'였음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바싹 지진 빈대떡이 물김치 국물로 알맞게 촉촉해지면 씹는 맛이 한층 재미있어진다.
적당히 눅눅해 진 빈대떡과 아삭하게 씹히는 배추나 무를 한 입에 우물거릴 때의 만족감이란. 특히 온냉(溫冷)이 번갈아 입 안을 자극하여 그 맛은 배가 되니, 단지 달고 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맛 자체가 한층 더 입체적으로 팽창하여 기억에도 맛의 잔상을 그만큼 오래 남기게 된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렇게 온기를 가진 음식과 냉기를 가진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그 맛을 상승시키는 예가 몇 개 있다. 예를 들면 뜨거운 커피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덩어리 넣어 먹는다든가, 메밀 반죽을 뜨겁게 갓 부친 전병 위에 차가운 훈제 연어와 차가운 크림, 레몬즙을 뿌려 돌돌 말아 먹는 프랑스식 메뉴 등이 그렇다.
입 안을 덥혔다 식혔다 하면서 맛 이상의 맛을 선사하는 요리를 이 겨울, 할아버지와 함께 먹고 싶다. 그것이 빈대떡 넣은 김치말이든, 따뜻한 수육을 얹어 먹는 냉면이든, 차가운 보쌈김치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제육을 싸 먹는 것이든 할아버지와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이제는 나도 이 맛을 이해한다고 자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