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대충 때우는 밥? 손님상에도 내놓던 별미!
더운 날 찬물에 보리밥을 말고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으면 별미다. 겨울철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서 김치를 쭉쭉 찢어 얹어 먹어도 맛이 남다르다. 보리굴비를 가닥가닥 찢어 고추장에 찍은 후 물만밥에 얹어 먹으면 아예 밥도둑이다.
하지만 오늘날 물만밥이 점잖은 식사는 아니다. 집에서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울 때 먹는 밥이지 온 가족이 모인 식사 때나 손님을 대접할 때 차릴 수 있는 밥상은 아니다. 그런데 고문헌을 보면 예전에는 물만밥을 손님상에 내놓아도 전혀 흉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젊었을 때 원로들에게 인사를 다니는 장면이 목은집에 보인다. “이정당(李政堂) 집에서 물만밥을 얻어먹고 왔다”고 했고 “어제 철성시중(鐵城侍中) 댁과 박사신의 집에서 물에 만 밥을 먹었고 임사재 집에서는 성찬을 대접받았다”고도 적혀 있다.
정당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종2품 벼슬로 차관보급이고 시중은 정승이니 장관급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고위 공무원 집에 인사를 갔는데 물만밥을 먹었으니 그런 문전박대가 없다. 그런데 이색은 당시 전도유망한 젊은 인재였고 정승 집에 인사 다닐 정도로 교분이 있었으니 하찮은 대접을 받았을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예전에는 물만밥이 지금처럼 끼니나 대충 때우는 음식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6년 기록에 역적모의를 취조한 기록이 있다. 평안도 도사 이운징의 취조 기록인데 친구가 찾아와 사랑방에서 담소하다 물에 만 밥을 먹은 후 헤어졌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한자로 수반(水飯)이라고 썼는데 지체 높은 양반이 제대로 먹는 식사였고 때문에 손님이 왔을 때도 가볍게 내놓는 식사 또는 별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물에 만 밥, 또는 물과 밥을 끓인 수화반(水和飯)을 먹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물에 눌은밥을 말아서 먹는 누룽지 문화가 발달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지금은 혼자서 대충 먹을 때 이외에는 웬만큼 스스럼없는 사이가 아니면 물에 밥을 말아서 함께 먹지 않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물에다 밥을 말아 먹는 것이 제대로 된 식사법이었던 모양이다.
중국에서도 당송 무렵에 물만밥을 먹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당나라 말기 사람인 유숭원의 금화자잡편(金華子雜編)에 저녁밥 먹기 전 점심으로 수반 몇 수저를 뜨는 데 그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점심은 오찬이 아니라 저녁 전에 가볍게 먹는 간식이라는 뜻이다. 물에 끓인 밥으로 가볍게 요기를 한 것이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아예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의 야시장에서는 거리에서 물에 만 밥, 구운 고기, 마른 육포 등을 판다고 적혀있다.
물에 만 밥은 그냥 밥과는 또 다른 독특한 풍미가 있으니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별도의 식사법으로, 또 별식으로 발달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과 중국에서는 남들 앞에서 물에 밥을 말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물만밥, 즉 수반의 풍습이 남아있다. 초간단 식사법으로 밥에다 뜨거운 찻물을 부어서 먹는 차즈케(茶漬け)라는 식사 습관이 그것이다. 이렇듯 밥 먹는 법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