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의 북상 속도는 하루 20km. 가을 단풍의 남하 속도는 하루 25km. 봄은 더디 오고 가을은 쏜살같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한순간. 해마다 봄이 오는가 싶으면 금세 더워지기 시작한다. 봄이 오면 쉬이 갈까 두렵고, 봄꽃이 피면 곧 질까 또 걱정스럽다. 도대체 봄은 언제부터 봄인가. 입춘(올 2월4일)부터인가. 아니면 양력 3월부터인가. 입춘은 왜 한자로 '들일 입(入)'의 入春(입춘)이 아니고, '설 립(立)'의 立春(입춘)일까. 그렇다. 입춘은 그저 '봄기운이 들어섰다'는 뜻일 뿐이다. 결코 '봄이 시작되는 날'이 아니다. 24절기는 고대 중국 황허 강 주변인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화베이 지방은 위도가 북위 34.8도로 우리나라 제주도(33~34도)와 부산(35도) 사이에 위치한다. 우리나라 전라남도 강진·해남과 경상남도 남해·통영과 비슷한 위치다. 한참 북쪽에 사는 서울(37.6도) 사람들이 입춘에 봄을 느끼기는 힘들다. 봄이 와도 도무지 봄 같지 않은 것이다(春來不似春).
하루 평균 기온 5도 넘어야 진짜 봄
기상학적으로 봄은 '하루 평균 기온이 5도가 넘을 때'를 말한다. 우리나라 최근 30년간(1981~2010) 하루 평균 기온이 5도가 넘어선 날은 3월12일이었다. 입춘 지난 뒤 무려 36~37일이나 걸렸다. 서울은 입춘 뒤 39~40일 지난 3월15일에야 5도를 넘었다. 이에 비해 부산은 입춘 뒤 7~8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올해 경우 부산보다 아래인 강진·해남 통영은 2월10일 이전에 이미 봄이 상륙했다는 계산이다. 지난 30년간 입춘 날 평균 기온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남한) 전체로는 영하 1.5도, 서울은 영하 2도를 기록했다. 중부 지방인 청주(-1.9도)와 비슷했지만 광주(0.7도) 강릉(1.0도) 부산(3.1도)보다 훨씬 추웠다. 입춘 날 봄 날씨를 보인 것은 제주(5.2도)가 유일했다. 제주엔 진작부터 봄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 봄은 한반도 아랫도리에서부터 온다. 전남 강진·해남과 경남 통영이 바로 그렇다. 그곳은 한반도의 튼실한 밑동아리다. 질펀하고 너른 갯벌이 악착같이 바다에 뿌리박고 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 차르르? 차아~ 철썩?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닷 물소리, 끼룩대는 갈매기 떼, 눈부시게 부서지는 은빛 햇살…. 그곳은 생명 가득한 이 땅의 자궁이다. 꼬물꼬물 까르르 웃어대는 '아기들의 궁전'이다.
/ 강 / 진 / 뻘밭에 봄 내음 질펀하구나
월출산은 우뚝우뚝 뼈로 서 있다. 너른 벌판에 홀연히 자리 잡고 있다. 전남 나주·영암에선 우람한 월출산 등짝이 보인다. 씨름 선수 등판 같다. 어깨 등뼈가 완강하다. 봉우리 암벽이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밤새 얼었던 바위얼음이 봄 햇살에 파드닥거린다. 강진에서 월출산은 앞가슴 쪽이 보인다. 영암에서 보는 등 쪽이 굵고 뭉툭하다면, 강진에서 보는 앞쪽은 선이 가늘고 화려하다. 바위 봉우리가 왕관처럼 뿅뿅뿅 솟았다.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천황봉(809m)은 그 정점이다.
제주 유배를 떠나는 이들이 넘던 누릿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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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는 '월(月)'자로 시작되는 동네가 많다. 신월, 상월, 월남, 월하, 월송, 대월마을이 그렇다. '월(月)'은 월출산을 뜻한다. 월출산 남쪽 마을이 '월남'이고 월출산 아래가 '월하'다. 월남마을은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천년이 넘는 동네다. 월남사 터엔 3층석탑이 묵묵히 서 있다.
1801년 겨울, 귀양길에 나선 다산 정약용은 누릿재(황치·黃峙)에 닿았다. 누릿재는 영암과 강진을 가르는 황토고개. '강진 귤이 누릿재 넘어 영암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바로 그 고개다. 1840년 9월 추사 김정희도 바로 누릿재를 넘고 강진·해남을 거쳐 제주 유배를 떠났다. 강진·해남 선비들이 한양 가는 길도 그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정약용은 죄인 신분이었다. 발아래 강진 읍내 초가집들이 굴 딱지처럼 닥지닥지 엎드려 있었다. 짭조름하고 알싸한 겨울 바닷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문득 오른쪽을 보니 월출산의 바위 봉우리가 보였다. 마치 한양에서 보는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봉우리 같았다. 그때 이 시를 썼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은지
현재 누릿재는 우거진 나무와 풀로 지워졌다. 옛 서낭당 자리도 사라졌다. 월출산국립공원 야생화단지에서 흔적을 더듬어 올라가야 한다. 요즘은 동네 촌로들만 운동 삼아 넘나든다. 고개는 가파르지 않고 밋밋하다.
누릿재~월남마을~월하마을~성전삼거리 15km 누릿재에서 내려오면 신월, 상월마을이다. 그 아래가 바로 천년이 훨씬 넘은 월남마을이다. 큰 절집 월남사가 있었던 곳이다. 월남사 터는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다. 정약용도 누릿재에서 월남마을을 지나 무위사~월하마을~성전삼거리로 내려갔다. 누릿재~성전삼거리는 약 15km 거리.
무위사(無爲寺)는 화장기 없는 절이다. 육자배기 주막집 주모처럼 선하게 웃으며 맞는다. 극락보전(국보 제13호)도 소박하고 단아하다. 절 마당 매화 꽃망울은 탱탱 불어터져 금방이라도 벙글 듯하다.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이 유난히 풍만하다. 섹시하다. 봄바람이라도 난 걸까. 마치 콧노래를 부르는 듯, 차림새가 날아갈 것 같다.
남포마을~해창마을 강진만 둑길 따라 4km
강진의 봄은 색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황토는 촉촉이 젖어 더욱 붉다. 연둣빛 보리들이 우우우 종주먹질을 해댄다. 누런 강진만 갈대 숲이 바람에 뒤척인다. 파릇파릇한 마늘밭이 싱그럽다. 강진만 넘어 겹겹이 이어지는 산과 산들이 아슴아슴하다. 검은 갯벌과 그 너머 바다가 뿌옇다. 논두렁 마른풀 타는 냄새 고소하다. 저녁밥 짓는 냄새도 구수하다. 강진만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가슴을 흔들었다. 상큼한 매생이 냄새가 묻혀 있다. 검고 차진 뻘흙이 잔뜩 버무려져 있다.
남포마을 입구~해창마을까지 강진만 둑길을 따라가는 길(4km)은 온몸으로 봄바람 샤워를 하는 곳이다. 아직 돌아가지 않은 철새들이 갯벌에 코를 박고 있다. 고니 떼들이 한낮 갯벌에 엎드려 죽은 듯이 자고 있다. 보초 한 마리만 눈을 뜨고 경계를 편다. 해 질 녘이 되면 일제히 일어나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난다. 육지는 늘 바다에 발을 적신다. 그리고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엔 만(灣)을 만든다. 강진만도 발가락 틈새처럼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봄은 바로 그 발가락 틈새로 흠뻑 젖어온다.
다산초당 앞바다~동쪽 18번 군도 24km 다산초당 앞바다에서 시작하는 동쪽 해안도로(18번 군도)는 어찔어찔 멀미 나는 '봄길'이다. 길이 24km. 길은 바다 옆구리에 바짝 붙어 있다. 관중석과 경기장이 붙어 있는 축구 전용 경기장 같다. 이 길 따라 땅끝마을 해남이 나온다. 연둣빛 바다, 연둣빛 아기보리밭, 파릇파릇 마늘밭, 아릿한 푸른 하늘, 노란 갈대 숲. 강진만 넘어 겹겹이 이어지는 산과 산들의 아슴아슴한 능선. 느릿느릿 걸어도 4~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걷다 보면 봄 바다의 여린 숨소리가 들린다. 새콤 달착지근한 바다 냄새가 난다. 나른한 봄볕에 눈꺼풀이 한순간 무거워진다.
강진만 서쪽 해안도로는 23번 국도다. 칠량~고려청자도요지~마량으로 이어진다. 칠량은 바지락과 전통 옹기가 유명하고, 마량(馬良)은 제주도에서 말을 실어 내린 곳이다. 서울로 말을 보내기 전에 살을 찌운 곳이라 해서 마량이라 불렀다. 앞바다엔 까막섬이 있다. 이 길도 봄빛 가득 연두색이다. 언뜻언뜻 푸른 보리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은빛 바닷물이 눈부시다. 하지만 번잡하다. 자동차들이 수시로 오간다. 길도 맞은편 18번 군도처럼 바다에 바짝 붙어 있지 않다. 승용차 드라이브 코스로 괜찮다. 먼발치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저물녘 황금빛에 물든 바다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설움이 울컥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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