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전쟁 치르듯 김장을 끝냈다. 예전에는 김장용 무를 뽑으면 반드시 무청을 따로 모아두었다. 시래기를 얻기 위해서였다. 지저분한 겉잎을 떼어내고 깨끗하게 다듬은 무청을 아버지는 굴비 엮듯 짚으로 두름을 엮으셨다. 이것을 집 뒤 굴뚝 옆 처마 밑에 매달아놓았다. 요맘때 뒷동산에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면 집집마다 걸어놓은 무청 두름이 볼만했다. 시래기로 마르기 전의 무청 두름은 마치 파란색 발을 엮어 늘어뜨린 것 같아 보였다. 굴뚝에 저녁 연기 오르고 연기가 동네에 자욱이 깔리면 연무 같은 연기 속에서 파란 무청이 더욱 도드라졌다. 연기와 함께 겨울햇볕에 마른 무청은 마침내 시래기가 되어 한겨울 내내 가난한 농가의 국거리 나물거리가 되어주었다.
↑ [조선닷컴]시래기국밥
↑ [조선닷컴]떡갈비
↑ [조선닷컴]지리산 흑돼지 삼겹살이나 목살
겨울 농촌의 영양공급원이었던 추억의 시래기
시래기를 넣은 된장찌개는 겨우내 농가의 밥상에 올라왔다. 사실 찌개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찌개'는 고기나 두부 등 고급스런 재료가 들어갔을 때 썼고, 보통은 '장 지져먹는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 시래기 된장찌개는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대보름날에는 특별히 참기름을 듬뿍 넣고 평소보다 맛깔 나게 무쳐먹었다.
시래기 장을 떠먹을 때 가끔 굵직한 된장 덩어리가 나온다. 장을 지지기 전, 어머니가 낡은 어레미(발이 굵은 체)로 된장을 거르다가 실수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된장 덩어리를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짜고 떫었던 그걸 고깃덩어리라고 부르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 된장 덩어리와 함께 가끔 무 대가리 부분 마른 것도 건져 올렸다. 무청을 무의 몸통으로부터 잘라낼 때 함께 잘린 부분이다. 쫄깃하게 씹히면서도 구수한 맛이 났다. 고기가 귀했던 시절, 이런 것들을 건져먹으면 횡재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
시래기는 알려진 대로 식이섬유가 풍부하다. 칼슘, 철, 미네랄과 함께 비타민 A, C, B1, B2 등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시래기는 영양가 있는 이렇다 할 땟거리가 없었던 농촌 사람들의 겨울을 거뜬하게 나게 했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농촌 들판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온갖 화려한 음식들이 생겨나면서 시래기는 뒷전이 되었다. 농가에서도 더는 김장철에 따로 시래기를 매달아두지 않는다. 시래기 장은 언제부턴가 먹고 싶어도 먹기 어려운 음식이 되었다.
양구 청정 시래기를 파주 장단콩 된장으로 푸짐하게 끓여내
최근 오랜만에 가본 경기도 파주에서 반가운 시래기국밥을 만났다. 새 시가지가 들어차 달라진 모습이지만 얼추 보니 예전 금촌역에서 우시장으로 넘어가던 언덕배기 밑에 자릴 잡았다. <아리몽>이라는 고깃집인데 식사 메뉴로 시래기국밥(5000원)을 판다.
구수한 시래기와 잘 어울리는 된장은 역시 파주 통일촌에서 수확한 장단콩으로 담근 된장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공장제품 된장과는 확실히 풍미가 다르다. 여기에 국물은 멸치로 우려낸 육수를 썼다. 시래기국은 소고기국물도 좋지만 겨울철엔 멸치국물이 개운하고 구수하다. 햇멸치로 깔끔하게 낸 국물이 한결 시래기의 구수함과 잘 어울린다.
시래기는 주인장이 여기저기 물색 끝에 강원도 양구군에서 양질의 시래기를 구했다. 양구의 해안시래기영농조합과 계약을 맺고 장기적으로 공급받고 있다. 시래기 맛과 질감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리 한 번 삶아서 껍질을 벗겨낸 시래기로 국을 끓여내 질기거나 뻣뻣하지 않고 시래기 고유의 구수함이 살아있다.
이 집은 점심에 시래기국밥을 주문하면 큼직한 떡갈비도 서비스로 내온다. 고깃집을 겸하고 있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반반씩 넣어 만든 수제 떡갈비는 서비스로 먹기엔 미안할 만큼 맛이 괜찮다. 더 먹고 싶으면 별도 주문도 가능하다. 2개에 3000원씩이다. 시래깃국과 떡갈비, 얼핏 안 어울릴 듯 하지만 옛날 고깃국에 대한 간절함이 깊었던 이들에겐 최상의 조합이다.
숙주나물, 김치, 멸치볶음, 무생채 등의 찬류도 맛깔스럽다. 무엇보다 향이 짙은 쑥갓나물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질 않는다. 찬류는 때에 따라 종류와 가짓수가 바뀐다고 한다. 큼지막한 뚝배기에 푸짐하게 퍼줘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 혹시 밥이 부족하면 공기 밥은 얼마든지 무료로 리필이 된다.
지리산 흑돼지 곁들이니 밥상이 한결 넉넉해져
사실 이 집은 고깃집이다. 일반 돼지보다 육질이 뛰어나다는 지리산 흑돼지를 취급한다. 가족이나 동료 등 일행 여럿이 들렀을 경우, 달랑 시래기국밥만 먹고 일어서기 뭣하면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이나 목살(200g 1만3000원)로 미리 기름칠을 해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해발 고도 500m 내외의 중산간 지대 서늘한 고장에서 자란 지리산 흑돼지는 살 속 지방층 분포가 이상적이다. 버크셔라는 품종인 지리산 흑돼지는 더디 자라고 몸집은 크지 않다. 그러나 고기의 풍미와 육즙은 익히 잘 알려졌다. 일반 돼지고기에 비해 고소한 맛은 진하고 지방의 느끼함은 덜 한 편이다. 참숯불과 구리 석쇠 위에 올려놓은 두툼한 흑돼지 목살과 삼겹살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지리산 흑돼지를 먹고 나서 마주하는 시래기국밥은 한결 담백하고 구수하다. 마치 사우나에서 나와 냉탕으로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지리산 흑돼지 구이와 시래기국밥, 미각의 폭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즐기면서 개운하고 시원하게 마무리하는 음식조합이다.
얼마 전 강원도 홍천군에서는 시래기 축제를 개최했다. 시래기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농가 소득 향상을 목적으로 연 것이다. 건강식품으로 조명 받는 시래기가 미국으로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 시래기의 저력도 만만치 않다. 구수한 옛 맛 되찾아주고, 건강도 챙겨주면서 농가 소득까지 올려주는 고마운 시래기.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 식재료로 우뚝 서길 기대해본다.
<아리몽>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496-4 (031)957-7100
기고= 글 이정훈, 사진 임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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