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론칭으로 온 언론 매체가 떠들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최초로 입성한 미슐랭 3스타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 아닌가. ‘천상의 맛’, ‘미각의 극치’…. 그들이 쏟아낸 최상급의 헌사도 눈부셨다. 그러나 엄청난 형용사들 속에서 피에르 가니에르의 실체는 궁금증만 뭉실뭉실 더해질 뿐이었다. 저녁 한 끼 30만원의 압박 속에서 이틀을 고민했다. 결국 궁금증이 절정에 달한 10월 15일 저녁, 나와 똑같이 궁금증에 몸을 떨던 세 사람(프렌치 셰프 Y, 레스토랑 오너 K, 레스토랑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 탐식가 H)과 함께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을 찾았다. 이날은 한 연예인 부부가 별실에서 저녁 모임을 가졌고, 홀 좌석에는 외국인 포함 일곱 팀 정도가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어뮤즈 부셰를 먹으면서 우리가 주문한 것은 1인당 22만원짜리 코스 요리. 첫 번째 애피타이저와 함께 긴 만찬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1 시금치크림과 렌틸콩, 구운 호박이 곁들여진 오리간 달걀찜.
탐식가 근데 레몬트리는 왜 우리를 여기 모은 거예요? 알고 싶은 게 뭐야?
레몬트리 궁금하니까. 근데 어디에서도 구체적으로 얘기를 안 해주니까. 더 구체적으로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남편이랑 한번 와볼 만한 곳일까, 하는 궁금증?
탐식가 비싼 돈을 들여 식사를 한다는 건 얼마나 그 기억이 오랫동안 갈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연관성을 갖죠. 즐거운 기억이 오래 남을수록 그 값어치를 하는 게 아닐까요?
오너 “거기 진짜 좋았어!”라고 할 때는 단지 음식 맛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죠. 당시의 개인적인 기분이나 분위기, 서비스도 많이 좌우되고.
탐식가 예전에 뉴욕에 있는 르 버나딘(유명 프렌치 해산물 레스토랑)에 갔을 때, 한 동행자가 음료로 콜라를 시켰어요. 미안한 말이지만 나 속으로 좀 창피했어. 근데 서버가 그 순간 너무나 세련되게 “아, 맞다. 동양 애들은 술 많이 못 먹더라. 이 음식에 콜라도 재미있겠는걸?” 하면서 너무나 멋지게 얼음 채운 샴페인 통에 콜라를 딱 꽂아서 내주는 거야! 결국 감동의 서비스란 어느 누가 오더라도 편안한 느낌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근데 보통 사람들 이런 데 오면 좀 긴장되는 게 사실이잖아요?
오너 그리고 그 긴장의 수준이란 것도 사람들마다 다르고요.
탐식가 맞아. 초등학생이라면 크라제버거 같은 데 가서도 주눅 들 수 있는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서비스, 파인 다이닝에는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는 거죠. 근데 와인잔이 전부터 비었는데, 안 채워주네.
#2 양상추와 전복, 포도 위에 소스와 베이컨을 얹은 샐러드.
셰프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즐길 땐 서비스, 맛, 프레젠테이션 등이 다 충족되어야 해요.
레몬트리 프레젠테이션의 예를 구체적으로 들자면?
오너 맨 처음에 빵 내놓으면서 버터에 기름종이 한 장 덮어 나왔잖아요. 그걸 서버가 스푼과 포크를 사용해 쇼하듯이 살짝 집어 올리잖아요. 프레젠테이션이란 음식을 내놓는 물리적인 환경들 일체를 말하는 거죠.
탐식가 외국의 어떤 레스토랑에 갔더니 명품 라비올 나이프를 색깔별로 좍 갖고 오더라고요. 자기 취향에 맞춰서 고르라는 거야. 별건 아닌데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3 게살, 콜리플라워 등을 곁들이고 소스와 파프리카채로 장식한 대구 요리. 별도의 작은 접시에 미니 샌드위치처럼 만든 아보카도 크로크무슈가 등장.
레몬트리 지금까지 음식들 어때요? 본토 프렌치와 비교하자면?
셰프 요즘은 정통 프렌치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파인 다이닝은 굉장히 많은 실험을 하고 재료에도 무한도전하니까. 오늘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무난하다는 느낌이에요. 아주 정확하게 조리되었고 음식은 참 맛있는데 기대만큼 새로운 느낌은 아니네요.
레몬트리 저는 프렌치는 약간 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네요.
셰프 파인 다이닝은 원래 간이 강하지 않은 게 맞아요. 약간 짜게 풀어내는 셰프도 있고, 이렇게 적절하게 한계선에서 딱 끝내는 셰프도 있고.
오너 의도한 바도 좀 있는 듯해요. 외국처럼 와인을 많이 마시는 경우엔 간이 좀 짜도 괜찮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식사 중 와인을 많이 곁들이는 편이 아니니까.
#4 갖가지 야채에 레몬그라스 향의 육수를 부은 야채수프. 홀스래디시 크림을 얹어 시식.
레몬트리 파리의 피에르 가니에르 음식과 비교해보는 건 어때요?
탐식가 그냥 문화적 관점으로 보는 게 맞다고 봐요. 파리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프렌치 악센트가 파바박 들리고 팔이 긴 프렌치 서버가 음식을 착착 내주고 하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먹는 음식과 한국의 식당을 동등 비교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오너 아까 프렌치 서버(런던의 스케치에서 근무한 바 있는 프랑스인 서버가 한국에 상주 중이다)가 와서 소스 끼얹어줄 때 봤어요? 스푼을 싹 돌리는 스냅 하나도 한국 사람이 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잖아. 그런 것들이 다 요리에 대한 느낌과 연관이 있는 거니까, 파리와 직접 비교를 하기에는 무리예요.
#5 잣이 들어간 샐러드와 붉은 비트 시럽이 어우러진 송아지등심스테이크와 라비올리가 함께 나옴. 비트젤리와 아이스크림도 따로 제공.
탐식가 한국에서는 역시 쇠고기 스테이크라는 걸까. 가히 인상적인 재료는 아닌 것 같군요. 메인 정도는 재료를 더 자유롭게 써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셰프 현재 프랑스에서 재료 대부분을 공수해서 쓴다니, 비둘기나 토끼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었을 텐데.
오너아니, 손님들이 “징그러워” 했을걸요. 한국인들이 프렌치를 1년에 몇 번이나 먹을까요? 대중은 아직 파스타보다는 스파게티인데, 그런 상황에서 비둘기? 무리예요. 우리 식당도 실험적인 거 많이 해봤죠. 손님들이 “오리발도 있네. 개구리도 있고, 골수까지…” 하며 메뉴를 읽다가는 결국 “스테이크요” 해버린다는 거죠.
탐식가 워낙 먹는 횟수가 적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제주도에 돼지국수가 맛있다며?” 하지만 1년에 한 번 제주도 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회가 아닌 국수를 먹고 올 수 있겠어요? 그래도 송로버섯(트뤼플)도 한 번 안 나왔다는 건 좀 아쉽네요.
셰프 맞아요. 이런 데 온다는 건 “나 거기서 이런 것도 먹어봤어” 하는 의미도 있는 건데. 프렌치가 한국에 오면 좀 불리한 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탄수화물 메뉴가 없거든요. 프렌치에도 쌀 곁들여 나오고 그런 요리가 있긴 한데, 실제로 프랑스에서 프랑스 셰프가 쌀을 곁들여 내면 ‘아, 그렇구나!’ 하는데 한국에서 한국 셰프가 프렌치라고 하면서 쌀을 곁들여 내면 ‘어라? 이게 뭐야’ 해요. 그래서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죠.
#6 셔벗처럼 시원한 산양치즈파르페, 오렌지와 파프리카가루 입힌 치즈볼.
레몬트리 오늘 와인이 참 좋은데요. 와인 리스트 보시니 어때요?
탐식가 제가 주문한 화이트와인은 여기서 가장 저렴한 가격대였어요. 가장 싼 게 12만원인데, 이건 17만원 선. 그렇지만 참 괜찮네요. 와인 리스트는 아주 좋아요. 극상의 빈티지까지 있는 건 아니지만. “왜 이런 곳에 61년산 마고가 없는 거야?” 하며 소믈리에에게 투덜댈 수 있는 즐거움이 있을 순 있겠죠. 하하.
오너 사실 코스의 가격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여기에 와인을 어느 수준에서 추가하느냐가 지출의 관건이겠죠. 사실 이런 곳에서는 샴페인 마시고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한 병씩 느긋하게 마시고 디저트 와인을 추가할까 말까, 이 정도는 되어야겠으나 그러면 1인당 50만~60만원을 훌쩍 넘기겠죠.
#7 밀크초콜릿을 얹은 오렌지마멀레이드와 셔벗, 각종 초콜릿, 머랭을 얹은 자두마멀레이드 등 디저트 4가지와 커피 혹은 차.
셰프 마지막 디저트까지 첫인상과 비슷하게 가네요. 강한 인상보다는 정확한 조리법에 무난한 맛을 추구한 것 같아요.
오너 질감이나 퓌레의 농후함 등이 전체적으로 좀 가벼워요.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는 배려가 많이 작용한 것 같고, 한국 사람이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는 만족스럽죠.
셰프 원래 고수 셰프에게는 음식 쓰레기가 없다고 해요. 재료를 남김없이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거죠. 메뉴 구성에서 그런 면이 좀 엿보이네요. 오렌지소스가 있었는데, 나중에 오렌지 필이 나온다든가 하는 재료의 중복이 몇 번 보였어요. 그러다 보니 디저트에 피망이 들어간 건 독특한데, 얼마 전에 먹은 그 재료의 색감과 맛이 아직 입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먹게 되니까 새로움이 반감되는 면이 있는 거죠.
레몬트리 가격 수준은 어떻게 생각해요?
셰프 딱 점심 코스 정도 가격이면 좀 활발하게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너 아까 좀 일찍 와서 바랑 다 둘러봤는데, 순간 머릿속에서 금액이 마구 올라가더라고요. 인테리어 비용에, 재료 공수에, 프랑스에서 데리고 온 직원들, 게다가 피에르 가니에르라는 이름의 로열티까지… 이건 장사의 손익 개념으로 따질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에요.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 그거죠. 그러니 우리는 그 취향에 감사하며 여기서 즐겨주면 되는 거예요.
탐식가 우리가 목말랐던 걸 채워주는 고마움이 크다고 봐요. 서울 피에르 가니에르에 앉아서 여기가 좋으니, 나쁘니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죠. 불과 10년 전에 라쿠치나의 파스타 먹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수준이었는데.
레몬트리 어떤 분들에게 이곳을 추천해주시겠어요?
탐식가 일생에 딱 한 번, 무리를 해서 오겠다 할 분위기는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가격 대비 재료를 훨씬 풍부하게 쓰고 인상적인 쇼잉(Showing)이 강한 곳에 가야 오래 남죠. 음식 좀 아는 사람들이 와서 세게 한번 질러볼까 싶을 때? 그러면서 ‘호사스러운 컴플레인의 자유’도 좀 느껴보고 싶을 때?
오너 이 브랜드와 그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나와 일체화시킬 수 있는 경험. 결국 브랜드 경험에 대한 가치 비용이 아닐까 싶어요. 그걸로 충분하지.
셰프 가치 비용의 적정 수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말하긴 어렵죠. 일 년에 한두 번, 부부끼리 극상의 호사를 누리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왔을 때 기대치가 과잉되면 좀 ‘소박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나갈지 상당히 궁금해집니다. 이 메뉴는 연말까지만 가고, 이후부터 1년에 네 번씩 바뀐다니까. 게다가 지금은 비교 대상이 없지만 지금 추진 중인 조선·신라 호텔에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들여오면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높죠.
레몬트리 식사를 시작한 지 벌써 5시간이 지났네요. 미슐랭 스타의 명성을 체험하는 것 도 좋았지만, 풍성한 대화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1 호두, 파파야 등 열대과일 디저트
2 치즈 파르페와 치즈볼
3 달팽이가 든 감자 무슬린
4 피에르 가니에르 샴페인 바
기획 차윤경 | 포토그래퍼 롯데호텔 | 레몬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