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 '잇푸도' 매장에서 환하게 웃어보이는 가와하라 시게미 사장. 그는“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라멘을 먹게 될 때까지 꾸준히 메뉴를 개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wanfoto@chosun.com |
일본 라멘왕 가와하라 시게미
뜨거운 국물 음식을 찾게 되는 계절이 왔다. 요즘 '핫'한 국물 음식으로 일본식 라멘을 빼놓을 수 없다. 5년쯤 전부터 서울 신촌·홍대·이태원·대학로·신사동 등지를 오가는 20~30대에게 빠르게 전파된 음식이다. 특유의 진하고 구수한 국물과 짭짤한 면발 덕에 우리나라 인스턴트 라면을 위협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 라멘은 언제 생겨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대중적인 사랑을 얻게 된 걸까. 최근 한국을 찾은 '일본의 라멘왕' 가와하라 시게미(河原成美)씨를 만나 일본 라멘 이야기를 들었다.
"짠맛과 기름기가 정확히 반반씩 절묘하게 어우러질 것. 국물의 온도는 입에 넣었을 때 모든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70도가량을 유지할 것. 라멘의 기본 공식이다."
가와하라 시게미(58)씨는 20년 넘게 일본에서 '라멘왕'으로 불리는 요리사다. 1985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잇푸도(Ippudo)'라는 작은 라멘가게를 내면서 출발, 현재는 일본에만 61개 지점을 거느리고 있다. 최근엔 뉴욕·싱가포르·홍콩에까지 매장을 냈다. 12월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두 번째 음식점을 낸다. 5일 만난 그는 "우동이나 소바가 감촉으로 먹는 음식이라면 라멘은 궁합으로 먹는 음식이다. 염분과 지방을 적절히 조절하고 입에 딱 맞는 온도로 맞추는 게 라멘 맛의 핵심"이라고 했다.
―라멘은 중국에서 출발한 음식이라고 알고 있다.
"맞다. 중국 명나라 때 산시성(陝西省)에서 밀가루에 간수(습기가 찬 소금에서 저절로 녹아 흐르는 짜고 쓴 물)를 섞어 짠맛이 나도록 반죽한 면발로 국수를 만든 데서 시작됐다. 1660년대 말에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1872년 메이지 유신 때 조성된 요코하마의 중국인 거리에서 라멘을 파는 포장마차도 생겨났다.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건 2차 세계대전 직후다. 전쟁에서 돌아온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먹은 라멘 맛을 잊지 못하고 직접 만들어 먹으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물자가 가뜩이나 귀한 시대에 돼지뼈를 우려낸 국물과 면발만으로 맛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받았던 것 같다."
―지금은 일본 음식으로 인식돼 있다.
"철저하게 일본인 입맛에 맞게 개량해 전파한 결과다. 삿포로·도쿄·후쿠오카 등 고장마다 제조법도 다르고 풍미도 다 다르다. 삿포로 라멘은 돼지뼈와 전갱이를 넣고 푹 끓인 국물에 된장·간장·소금 중 하나를 골라 국물 맛을 낸다. 규수 지방 라멘은 삿포로보다 돼지뼈를 더 오래 푹 고아서 만든다. 국물 맛이 더 진하고 강렬하다. 도쿄 라멘은 반면 간장 맛을 더 중시한다. 오사카 라멘은 좀 더 맑고 다시마 등으로 맛을 내서 개운한 것이 특징이고. 최근엔 돼지뼈 냄새를 없애고 좀 더 깔끔하게 만든 라멘이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종류만 200가지가 넘는다던데.
"짠맛과 기름기 반반씩 국물 온도는 70도 유지" |
"한국 냉면은 지방에 따라 면발도 다르고 국물 맛도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론 메밀을 많이 넣은 면을 차가운 국물에 고명을 얹어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라멘은 기본적인 재료라고 할 수 있는 게 사실 없다. 처음엔 돼지뼈·닭 기름이 기본이었지만, 요즘엔 국물에 따로 찍어 먹는 라멘도 나오고 살짝 태운 기름으로 만든 라멘도 나온다. 생크림을 넣은 것도 있다. 삶은 달걀이나 고기를 얹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최근엔 과일을 얹은 라멘도 나왔다. 다시 말해 라멘은 철저히 소비자 입맛에 맞춰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는 열린 음식이다. 딱 하나 고집하는 원칙은 궁합이다. 너무 짜지도 너무 기름지지도 않게 국물과 국수를 조합해서 한 그릇에 담아내는 것. 이것만 지키면 훌륭한 라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아이디어의 음식인가?
"그렇다. 그 지방에서 흔하게 나는 아주 소박한 재료를 24시간 넘게 우리고 또 우려내는 부지런함과 끈기를 담아 만드는 음식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라멘이란 맨 마지막에 사람 뼈까지 우려내는 음식'이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외국으로 수출하는 라멘 맛도 그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가.
"뉴욕에 수출하는 라멘은 먹기 좋도록 면을 짧게 만든다. 수저받침도 외국인이 먹기 편하도록 크게 만들었다. 홍콩은 생각보다 음식을 덜 짜게 먹는다. 염도를 최대한 낮추고 맛을 부드럽게 했다. 한국에선 기본적으로 구수하고 매콤한 맛이 잘 팔린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라멘이 따로 있나.
"맹물과 약간의 닭 기름, 소금만 가지고도 라멘 맛을 낼 수가 있다. 소박하고 명료한 맛이라 좋아한다. 라멘을 먹을 땐 반드시 국물을 한 숟갈 먼저 떠먹고 난 다음에 면을 한 입 먹고 그다음에 위에 얹은 고명을 먹는다. 처음부터 휘휘 면을 섞어서 맛을 보면 라멘의 진짜 맛을 느끼기 어렵다."
[송혜진 기자 enave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