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은 바다의 인삼이라지만 낙지는 개펄 속의 산삼이라고 한다. 특히 가을에 잡히는 낙지는 맛도 좋아서 봄 조개, 가을 낙지라고 했다. 몸에 좋고 맛도 좋다는 뜻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보통 전어와 새우를 꼽지만 낙지도 빠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이 낙지를 좋아했다. '탐진어가(耽津漁歌)'라는 시에서 "어촌에서는 모두 낙지로 국을 끓여 먹을 뿐, 붉은 새우와 맛조개는 맛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고 읊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일찌감치 남도에서 귀양을 살아서 그런지 낙지 사랑이 대단했다. 형인 정약전도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낙지는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며 낙지 예찬론을 펼쳤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옛날부터 낙지를 좋아했던 것 같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광해군 때 사람인 허균은 팔도음식을 평가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낙지는 서해안에서 잡히는데 맛 좋은 것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적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낙지는 먼 옛날부터 한반도 특산품으로도 이름을 떨쳤던 모양이다.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교역 품목에 낙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산 낙지를 즐겨 먹은 것을 비롯해서 낙지 숙회, 낙지 연포탕 등 다양한 낙지 요리가 발달했다.
특히 요즘에는 매콤한 낙지볶음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널리 알려진 낙지볶음 요리로는 조방낙지가 있다. 낙지 앞에 수식어로 쓰이는 '조방'은 엉뚱하게도 낙지와는 관계없는 조선방직(朝鮮紡織)의 줄임말이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 동구 범일동 부근 자유시장 자리에 조선방직이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이 공장 옆에 있는 좁은 길이 낙지볶음 골목으로 유명했다.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인이 세운 회사로, 가혹한 노동조건과 노동탄압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수탈해 악명을 떨쳤던 회사다.
조방낙지는 이 조선방직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힘든 노동을 끝내고 퇴근하면서 술 한 잔 걸치며 끼니를 때웠던 음식이었다.
처음에는 공장 옆 골목의 낙지볶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자유시장이 들어서면서 외지 상인들이 몰려왔고, 바쁜 상인들이 이곳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이후 각자의 생업 터전으로 돌아간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조방낙지가 부산을 벗어나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맛있게만 먹는 낙지볶음 하나에도 따지고 보면 근대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다.
참고로 요즘 한창 낙지가 맛있지만 조선시대 과거를 준비하던 유생들의 금기 식품에는 미역국과 함께 낙지도 포함됐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시험을 앞두고 먹지 않는 까닭은 낙지가 한자로 낙제(絡蹄)인데 시험에 떨어진다는 뜻의 낙제(落第)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낙지와 관련된 속담으로 "개 꼬락서니 미워 낙지를 산다"는 말도 있다. 보통 고기를 사면 남은 뼈는 개에게 주기 마련인데 개가 얼마나 미운지 뼈마저도 주기 싫어 뼈 없는 낙지를 산다는 뜻이다. 낙지가 좋고 맛있다지만 한편으로는 낙지에 관한 뒷담화도 만만치 않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