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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 |
글쓴이: 편지 | 날짜: 2011-11-01 |
조회: 1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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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18일 방한 첫날 저녁 추어탕으로 식사를 했다. 다음 날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추어탕을 화제로 담소했다고 한다.
예부터 추어탕은 시골에서 보양식이었다. 여름부터 추수 때까지 논두렁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미꾸라지를 잡아 끓여 먹는 추어탕 한 그릇에 농부들은 기운이 솟아 힘든 농사일을 견딜 수 있었다.
한양에서 양반집 마님이 깊은 밤 사랑채의 서방님이 드실 야식으로 은밀하게 준비했던 음식도 추어탕이었다. 예전에는 천한 음식이라고 여겨 양반들이 드러내 놓고 먹기는 뭣했지만 정력에 좋다니까 남의 이목을 피해서 서방님께 어떻게든 드리고 싶었던 음식이었다.
옛날의 동양의학서나 민간 속설에서는 하나같이 미꾸라지가 정력에 좋다고 나온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에서 공통되는 일인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돈 후안에 버금가는 동양의 플레이보이가 서문경이다. 그가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명나라 때 소설 '금병매(金甁梅)'에서도 미꾸라지는 정력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금병매는 에로틱한 소설로 유명하지만 소설 속 음식과 요리법이 방대해 중국에서는 홍루몽과 함께 명나라 요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이 밖에도 추어탕이 좋다는 이야기는 옛 문헌 곳곳에 보인다. 중국 의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미꾸라지는 맛이 달고 평(平)하며 독이 없는 식품으로 특히 양기가 위축됐을 때 먹으면 치료가 된다고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양기가 부족할 때 미꾸라지를 끓여 먹는다고 적었다.
그런데 매우 정력적인 음식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논두렁에서 잡는 흔한 물고기였기 때문인지 옛날 점잖은 양반들은 내놓고 추어탕을 먹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헌에 추어탕 관련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어쩌다 추어탕이 나오는 문헌에도 농민이나 도시 하층민이 먹는 음식으로 적혀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추두부탕(鰍豆腐湯)이 나오는데 미꾸라지가 두부를 파고 들어가게 만든 후 잘라서 부쳐 먹거나 탕으로 끓여 먹는다고 했다. 맛이 매우 기름지며 한양에서는 성균관의 반인(泮人)들 사이에서 성행한다고 적었다.
반인은 관노는 아니어도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 신분으로 백정만큼이나 멸시를 받았던 조선시대 최하층민이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 걸인들이 추어탕을 독점적으로 끓여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또 다른 기록은 19세기 초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나온다. 한글로 '밋구리'라고 표기했는데 시골사람(野人)들이 국을 끓여 먹는데 특이한 맛(異味)이라고 설명했다.
서민음식인 추어탕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근대 초기다. 1929년에 나온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에 예전에는 선술집에서 하급 노동자들이 먹었던 추어탕이지만 지금은 경제가 곤란한 까닭인지, 계급사상의 타파인지 말쑥한 신사들도 먹는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1924년 발행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도 추어탕 끓이는 법이 소개돼 있다. 이 무렵에는 추어탕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추어탕은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남원 추어탕, 서울 추어탕 등 지역별로 특색이 있는 음식으로 발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는 일부 추어탕집은 정재계 유명 인사들도 자주 찾는다. 국가의 지도자까지 즐겨 먹으니 옛날과 비교하면 미꾸라지가 용 됐다. < 음식문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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