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습관적으로 마시게되는 ‘어른들의 불량식품’ 커피믹스를 바로보자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하루에 1100만 개, 한 해에 43억 개를 마신다? 논술 잡지 <월간 논>을 만드는 신관식(32)씨는 지난 7년간 하루 평균 7봉의
커피믹스를 위에 들이부었다. 군대 시절, 힘들 때마다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먹던 습관이
제대 뒤에도 계속됐다. 하루 활동 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로 보면 2시간에 한 봉씩 조제해 마신 셈이다. 사무실마다 신씨와 같은 이들이 많아서일까. 커피믹스 시장은 지난 5년 사이 3배 가까이 성장했다. 2001년만 해도 2128억원이었던 커피믹스 시장 규모는 매년 늘어 지난해에는 6047억원에 이르렀다. 커피믹스 한 봉당 가격을 140원(20개들이 2800원)으로 계산하면 연간 43억 개의 커피믹스가 팔려나갔다는 얘기다. 커피믹스가 ‘기호식품’을 넘어 대다수 직장인들의 ‘생필품’이 된 것이다. “지방·화학첨가물을 위에 들이붓는 셈” 커피믹스 커피 제조 과정은 간단하다. ‘커피 스틱 포장 귀퉁이를 뜯는다 → 내용물을 컵에 확 붓는다 → 정수기 물을 받는다 → 휘휘 젓는다.’ 수십만 명의 대한민국 커피믹스 애호가들은 아침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회사원 배진옥(27)씨는 “아침에 졸릴 때 먹으면 잠이 깨는 느낌이라서, 아침마다 먹는다”고 말했다. “깜빡하고 안 먹은 날은 ‘오늘 안 먹었지’ 생각하고 일부러 타 먹는다”고 덧붙였다. 저마다 조제의 비법도 있다.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이너 김남연(36)씨는 “스테인리스 스푼으로 휘저으면 열이 뺏겨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꼭 내용물을 비운 포장지로 저어야 한다”며 “휘젓는 재미로 믹스커피를 마신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한 봉지의 커피는 한 잔의 소화제다. 주부 김경례(42)씨는 “밥 먹고 나서 속이 더부룩할 때 마시면 느끼한 느낌이 가신다”고 말한다. 등산 가는 이들도 배낭에 한두 개씩 꼭 커피믹스를 꼽아 가고, 술 먹은 다음날은 입 안을 개운하게 하려고 또 한 잔 타 먹는다. 커피믹스는 이렇게 다양한 용처를 갖고 많은 이들을 중독자로 만들고 있다.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 공화국이다. 커피 소비량은 세계 11위지만, 인스턴트 커피 소비량은 세계 정상이다. 서유럽, 미국 등은 원두커피가 커피 시장의 80%를 차지한다. 일본도 60%가 원두커피 몫이다. 반면에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가 78%를 차지한다. 지난해 9512억원 커피시장에서 원두커피 판매액은 372억원으로 입지가 미미하다.
대신 인스턴트 커피는 7452억원, 그중에서도 커피믹스가 6047억원이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유리병에 담긴 커피, 설탕, 프림을 티스푼으로 떠서
저어 먹던 모습은 이제 ‘추억’이 됐다. 지금은 가로 2cm, 세로 15cm의 막대형 포장이 병커피와 티스푼을 대체해버렸다. 그렇다면 커피믹스에는 맛뿐만 아니라 건강도 ‘믹스’돼 있는 것일까. 날마다 마시는 커피믹스에는 과연 어떤 성분이 믹스돼 있을까.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의 저자 안병수씨는 “커피믹스를 컵에 붓는 것은 지방과 화학첨가물들을 위 속에 들이붓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안씨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문제는 ‘프리마’라고 불리는
커피 크리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 크리머가 우유나 유제품으로
만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주로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각성이 필요할 때는
꼭 커피믹스를 집어든다”는 회사원 윤민혜(28)씨도 커피 크리머 성분을 묻자 “우유로 만든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짙은 갈색빛의 커피가 프림을 넣으면 ‘부드러운 밀크빛’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맛도 부드러워져 왠지 우유 맛 같다. 별 생각 없이 꾸준히 먹어서 문제 하지만 짐작은 사실과 다르다. 커피 크리머에서 커피 색깔을 묽게 만들어주는 주성분은 우유가 아니라 기름이다. 식물성 유지(기름)를 물에 섞고, 물과 기름이 잘 섞이도록 식품첨가물 유화제를 넣으면 커피 크리머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물에 기름을 섞어 만든다고 해서 아베 쓰카사(<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저자)는 커피 크리머를 ‘밀크맛
샐러드유’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병수씨는 이 기름덩어리에 각종 식품첨가물들이 추가된 것이 커피 크리머라고 설명한다. 맛과 향이 부드러운 커피 크리머를 만들기 위해 카제인나트륨, 인산이칼륨, 폴리인산칼륨 같은 각종 식품첨가물들이 추가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사용되는 첨가물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공인한 것들이다. 안씨는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식품첨가물들을 자기도 모르는 채 하나씩 먹게 되면 하루에도 수십 가지 첨가물을 섭취하게 된다. 커피믹스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3~4잔씩 별 생각 없이 꾸준히 먹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
커피 크리머에는 예상과 달리
트랜스지방은 없다. 대신 100% 포화지방산이다. 포화지방도 다량으로
섭취할 경우는 건강에 해롭다. 한진숙 동의과학대 식품과학과 교수는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할 경우 심혈관계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오스트레일리아 아델레이드대 심장전문의 스티븐 니콜스 박사는 “포화지방인 코코넛 기름으로 만든 당근케이크와 밀크셰이크를 먹은 사람의 경우, 3시간 만에 동맥 내막 기능이 저하되고, 6시간 뒤에는 혈전으로 인한 염증을 억제하는 고밀도지단백질(HDL)이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포화지방이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를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커피믹스 뒤의 영양분석표에는 콜레스테롤 함량이 0mg이라고 쓰여 있다. 크리머의 포화지방이 콜레스테롤 함량을 높인다면야, 콜레스테롤 함량이 0mg이라는 건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김지영 식약청 전문위원은 “포화지방을 하루 섭취 열량의 10%까지 섭취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평소에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이 커피믹스 커피를 통해 추가로 포화지방을 섭취할 경우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커피믹스를 통해 섭취하게 되는 당분의 양도 적지 않다. 12g 커피믹스 한 봉에
담겨 있는 설탕은 5~6g이다. 하루에 커피믹스 다섯 봉을 먹는 사람은 설탕만 40g을 집어먹은 셈이다. 지난해 여성이 하루에 열량을 많이 섭취하는 식품 4위가 커피믹스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김초일 한국보건산업진흥연구원 박사는 “이렇게 커피믹스 섭취량이 늘다가는, 언젠가 한국인이 섭취하는 당분이 죄다 커피믹스에서 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합성 착향료 추가하고서 ‘웰빙 커피’? 최근에는 이런 커피 프리머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좋은 먹을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감안해
‘웰빙 커피’가 출시됐다. 하지만 이 웰빙도 미심쩍다. 특히 한국네슬레가 대니얼 헤니를 내세워 선전하고 있는 ‘웰빙 밀크커피’는 일반 커피에 없는 칼슘을 보강하기 위해 탈지분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일반 믹스커피에는 들어가지 않는 합성 착향료가 0.2% 첨가됐다. 안병수씨는 “커피에 들어가는 첨가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화제와 향료, 색소 등인데 기존 커피믹스에도 안 들어가는 합성 착향료를 쓰고서는 ‘웰빙’이라 이름 붙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혹과 의심,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커피믹스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안경호 동서식품 홍보실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커피 심부름을 하던 여직원들이 크게 줄면서 스스로 커피를 타서 마시는 문화가 정착된데다 냉·온수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커피믹스 시장이 성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 실장은
“커피믹스가 커피 시장에서 점점 확대되는 분위기가 마냥 반가운 건 아니다”고 말했다. 커피믹스 판매가 증가하는 것은 곧 ‘경기가 좋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 안 실장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빨리 털어 빨리 먹는 믹스 커피를 마시는 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은 커피를 먹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커피는 농도의 높낮이에 따른 무게감, 커피를 끓일 때 나는 향기, 얼얼한 맛에서부터 달콤한 맛까지를 결정하는 산도 등에 따라 수천 가지 맛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 케냐, 예멘 등 커피가 나는 나라에 따라 맛도 다양하고 기후, 재배 조건, 볶는 방법 등에 따라서도 맛이 천차만별이다. 커피 로스팅 전문가 전광수씨는 “이렇게 다양한 맛을 모른 채 모두 똑같은 커피 맛을 즐기는 모습이 슬프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월간 논>의 신관식씨는 7년의 커피믹스 생활을 접고 지금은 원두커피로 바꿨다. 신씨의 주장으로 지난해부터 사무실에 원두커피 기계를 들여놓은 것이다. 덕분에 사무실 식구들도 주로 원두커피를 마시고 가끔 커피믹스를 애용한다. 신씨는 “7봉씩 7년간 지속된 커피믹스 생활 동안 계속해서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속이 깔끔하다”고 말했다. 커피믹스에 천인공노할 ‘나쁜’ 성분이 들어 있는 건 아니다. 가끔 한 잔씩 즐기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몇 개씩 믹스 껍데기를 까다 보면, 배 언저리에 치유할 수 없는 포화지방을 두르고 다녀야 할 게 뻔하다. 어른들의 불량식품, 커피믹스. 무심코 뜯기 전에 ‘이 안에 뭐가 들었나’ ‘오늘 몇 잔 먹었나’ 의심을 찬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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