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사 때문에 대한민국이 뒤집어졌다. 한국 맥주가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더 맛이 없다는 한국 특파원 대니얼 튜더의 신랄한 비판에 숨어 있던 맥주 마니아들까지 점차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년도 채 안 돼 대한민국은 맥주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다. 전통의 한국 맥주와 다양함으로 무장한 세계 맥주, 그리고 개성 만점 '크래프트 맥주'까지.
어쩌면,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비해 국내 맥주 시장은 훨씬 규모가 커졌다. 국내산 맥주만 계산해도 2009년 대비 2012년 5.38% 성장했다. 즐기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났으니 당연히 말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소주'의 나라였던 한국이 '맥주'의 나라로 바뀌고 있다. 어떤 연유로 한국 사람들은 맥주에 '홀릭'하게 된 걸까.
REASON 1
VARIETY | 수입 관세 인하로 다양한 세계 맥주 들어와
여행 마니아 권미연(30) 씨는 해외에서 마시던 맥주가 종종 생각날 때면 대형 마트를 찾는다. 마트에서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를 판매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주로 미국의 버드와이저나 밀러, 벨기에 호가든, 아일랜드 기네스 정도가 판매됐지만 요즘은 맥주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독일·벨기에·체코·영국 등 유럽 맥주부터 호주·일본 맥주까지 다양하게 갖추고 가격도 훨씬 저렴해졌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원하는 맥주를 골라 카트에 담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이영은 롯데마트 주류 MD는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경험한 20~3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세계 맥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홈플러스 차주류팀 김홍석 바이어 역시 "홈플러스의 세계 맥주 매출이 전년 대비 15% 증가했으며 지속적으로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대형 마트 맥주 진열장이 세계 맥주로 가득 들어찬 이유는 소비자 경험이 다양해져 수요가 늘어난 점도 있지만, 2011년 FTA 체결 이후 유럽산 수입 맥주 관세가 크게 인하돼 수입 원가가 떨어졌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일본 맥주가 우세하다.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목 넘김이 깔끔한' 라거(하면 발효) 맥주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일본 맥주는 아사히, 기린,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이하 산토리),
삿포로 등이다. 해가 갈수록 일본 맥주의 인기는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산토리는 2013년 5월까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93.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비자들의 까다로워진 입맛을 잡기 위해 한국 토종 맥주 업체도 세계 맥주에 대비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OB맥주는 '100% 몰트 비어'를 표방한 '오비 골든 라거'를 선보였고, 하이트진로는 프리미엄 맥주 '맥스'를 8년 만에 '올 몰트 비어'로 리뉴얼했다. 세계 맥주가 비슷한 맛 일색이던 한국 맥주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셈이다.
REASON 2
TASTY | 다품종 소량 생산 '크래프트 맥주'의 역습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대니얼 튜더 기자는 뜻을 같이하는 한의사 김희윤, 금융업계 종사자인 양성후 씨와 함께 5월 초 맥줏집 '더 부스'를 직접 차렸다. 이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맛의 맥주를 선보이며, 주력 맥주로 '빌스 페일 에일'이라는 생맥주를 내놨다. 여느 맥주 회사에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자체 레시피로 생산한 맥주다. 이처럼 소규모 양조장에서 자신만의 레시피에 맞춰 만든 맥주를 크래프트 맥주라고 한다. 개성 있는 맛에 마니아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홈플러스는 국내에서 세 번째로 맥주 제조 면허를 받은 업체 세븐브로이와 손잡고 크래프트 맥주인 인디아 페일 에일(이하 IPA)을 내놨다. 국내 맥주 업체 최초로 캔과 병으로 시판하는 크래프트 맥주다. 평가는 상당히 좋다. 2012년 10월 4일 첫 출시 이후 2개월 만에 국내 프리미엄 맥주 점포별 평균 매출액 1위를, 2013년 상반기에는 홈플러스 세계 맥주 평균 매출액 순위에서 6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네 번째로 맥주 제조 면허를 취득한 카브루는 국내 유명 크래프트 맥줏집의 맥주를 그 매장만의 레시피로 맞춤 생산하고 있다.
미국 로스트 코스트 브루어리의 '로스트 코스트
인디카 IPA' 등 세계의 인기 크래프트 맥주 30여 종을 수입하는 브루마스터스 인터내셔널의 변진영 매니저는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일반 맥주와 달리 소규모 양조장에서 장인들이 만드는 수제 맥주라는 것을 꼽았다. 현지에서 직접 재배한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일반 맥주에 비해 3~5배 정도 많은 원료를 사용해 깊고 독특한 풍미와 조합에 따라 달라지는 섬세한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맥주가 판매되면서 안주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치맥(치킨+맥주) 대신 햄맥(햄버거+맥주)이나 피맥(피자+맥주)을 즐기기 시작했다. 햄버거와 피자는 묵직하고 진한 맛의 에일과 잘 어울린다. '피맥' 조합을 선보이는 더 부스 김희윤 대표는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외국에서는 피자 한 조각에 맥주를 곁들여 먹는 것이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소주나 와인, 막걸리에 비해 도수가 낮은 4~6도로 부담이 덜해서 음료수 대신 맥주를 곁들여 피자나 햄버거, 파스타를 먹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수제 햄버거 맛집이나 이탤리언 레스토랑도 다양한 종류의 크래프트 맥주를 구비하고 있다.
REASON 3
FUNNY | 가볍게 한잔 즐기는 문화로 변신
2013년 6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한 매장에 대낮부터 긴 줄이 늘어서 진풍경을 자아냈다. 그 줄은 모두 아이스크림 같은 식감의 '프로즌 나마'를 마시기 위해 팝업 스토어 '기린 이치방 가든'을 찾은 사람들이다. 팝업 스토어는 6월 2일 오픈 뒤 입소문을 타 1인당 2잔으로 제한을 뒀음에도 하루 1천 명이 방문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7월 말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일대에서는 '2013 대구 치맥 페스티벌'이 열렸다. 중국의 '칭다오 맥주'와 치킨 업체 '
교촌치킨' 등이 후원한 이 행사에는 첫날에만 5만여 명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앞선 두 사례 모두 맥주가 사람들을 손쉽게 유인할 수 있는 '핫 아이템'이 됐음을 설명한다.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태도도 변했다. 맥주 순례객들의 성지인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 일대에는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이 속속 생기고 있다. '크래프트 웍스 탭하우스'와 '맥파이' '더 부스' '더
스프링스 탭하우스' 등이다. 네 곳 모두 맥주 마니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맥주를 소개하려고 문을 연 가게들이다.
저녁 무렵 맥파이와 더 부스가 위치한 골목에는 독특한 광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가게 밖으로 나와 맥주를 즐기는 모습이다. 더 부스의 김희윤 대표는 "인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편한 복장으로 나와 한두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라고 설명했다. 더 부스를 둘러보니 성별·연령·인종 불문하고 사람들 모두 한 손에는 맥주를, 한 손에는 피자를 들고 있었다. 외국의 펍이 과음보다는 퇴근 후 지친 마음을 달래는 쪽으로 발전한 것처럼, 한국의 음주 문화도 가벼운 한잔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툭툭 털고 내일을 맞이하는 방향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맥주 한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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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협조·버거비 서소문점(02-395-1280), 더 부스 이태원점(1544-4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