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음료 지식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호주로 날아간 사나이가 있다. 제임스 정, 우리 이름은 정인섭. 본래 피아노를 전공한 그는 호주의 커피와 식음료 교육기관에서 음료에 대한 이론과 실무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수많은 마실 거리들과 사귀고 알아갔지만 가장 강렬하게 그의 입과 가슴을 끈 음료는 와인차였다. 공부하는 도중 잠깐 프랑스에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프랑스식 와인차 뱅 쇼를 접하면서 그의 와인차 사랑이 시작되었다.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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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날아온 와인차 전도사
와인차는 와인에 감미제와 방향제를 넣고 끓여 알코올을 증발시킨 후 따끈하게 마시는 차다. 겨울이 몹시 추운 북유럽에서 원기 회복이나 감기 예방을 위한 약으로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뱅쇼(Vin Chaud), 독일에서는 글루바인(Glühwein), 미국에서는 뮬드 와인(Mulled Wine)이라고 부른다. 표기는 달라도 모두 '따뜻한 와인'이라는 뜻이다. 호주, 프랑스, 독일, 미국 등 구미에서는 이미 널리 보편적으로 음용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겨울철에 즐겨 마신다.
경기도 일산의 한적한 주택가. 조용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아한 서구풍 인테리어가 아름다운 카페
가 눈길을 끈다. 안으로 들어서면 잔잔한 음악과 널찍한 공간, 쾌적한 공기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 집 주인장 정씨는 다년간 커피와 음료를 배웠지만 유독 와인차의 맛과 향기에 매료되었다. 이 멋진 맛과 향을 우리나라에 대중화시켜 와인차 문화를 일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오랫동안 일했던 호주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도 취할 겸 와인차 문화도 보급하려고 3년 전 귀국했다. 그러나 정씨의 바람처럼 우리나라에 와인차 문화가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아울러 와인차 보급도 대중화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가격장벽이다. 고급 와인 한 병에 겨우 와인차 두 잔이 나온다. 이걸 정씨는 한 잔에 9000원을 받고 있다. 물론 원가를 생각하면 아주 헐한 값이다. 보통 적정가격은 1만5000~2만2000원 선이라고 한다. 현재 일부 호텔에서는 그 가격을 받고 있다고.
와인차 보급 차원에서 나름대로는 저렴하게 받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차 한 잔 가격 9000원'은 국민 정서상 수용하기 쉽지 않다. '밥 한끼가 얼마인데'하는 말이 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주인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을 버텨왔다. "차라리 커피 한 잔 파는 게 훨씬 더 이득입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분들과 와인차의 깊은 향을 함께 공감하고 싶어요. 또한 와인차를 매개로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습니다. 지친 몸 속으로 스며드는 따끈한 와인을 느끼면서 점차 심신이 가벼워지는 체험을 많은 분들이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윽한 향기 즐기고 몸 덥혀 감기도 막고
정씨는 또한 국내 많은 블로거나 인터넷에 잘못된 와인차 정보가 과잉 유통되는 점에 대해서도 아쉬워한다. 특히 누구나 아주 쉽게 와인차를 만들 수 있다면서 소개한 레시피에는 엉터리가 대부분이라는 것. 이는 제대로 된 와인차 문화를 조성하는 데 저해 요소가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한다. 이 집에서는 알코올도수 11~13%인 양질의 와인을 사용한다. 어떤 와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와인차의 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와인 선택은 아주 중요하다. 전문가의 깊은 안목이 필요한 대목이다. 와인차로 적당한 좋은 와인과 과일, 계피, 정향, 기타 천연재료로 와인차를 만든다.
문제는 이렇게 만든 와인차가 일년 내내 언제나 같은 맛과 향과 색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정씨가 어떤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서 와인차를 취급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의구심을 품었는데 역시 며칠 못 가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와인차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 수도 없지만 그렇게 만든 와인차가 제 품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정씨의 생각이다.
몸의 컨디션이 떨어지거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또는 연인에게 프러포즈할 때도 와인차의 효험이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와인차를 찾는 손님이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 끓이는 과정에서 알코올 성분이 증발되어 알코올 성분은 거의 없지만 살짝 중독성이 있다.
드디어 와인차가 나왔다. 예쁘고 우아한 커다란 찻잔에 담긴 와인차는 색깔도 와인을 닮았다. 코를 가까이 대었더니 역시 와인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와인차 한 잔만 올려진 테이블이 아무래도 휑해 보였다. 그래서 주인장 정씨에게 물었다. 조그만 케이크 조각이라도 함께 내놓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잡스런 맛이 와인차 맛을 방해해선 안됩니다! 오직 와인차 맛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일체 다른 음료나 다과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막상 와인차를 마셔보니 그의 말뜻을 알 듯 했다. 밖에는 눈이라도 퍼부을 듯 음산한 겨울 날씨다. 따끈하고 향기로운 액체가 입안에서 목젖과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몸에서 한기가 떨어져나갔다. 한결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유럽 스타일의 쌍화탕이라는 주인장의 농담이 딱 맞았다. 한 잔을 더 마셨더니 북유럽의 어느 도시 뒷골목 카페에 온 듯한 느낌이다. 알코올도 없는데 분위기에 취한 모양이다.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지고 창 밖은 어느새 어둠. 문 밖으로 나가면 오로라가 반겨줄 것만 같다.
< coffee by James>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1153-2 (031)903-4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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