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란 대목이 나온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듦을 안다는 뜻이다. 제주도에 유배된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로 유명해진 말이다.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경주 보문관광단지의 물레방아 광장 언덕, 한식당 <솔미가> 뜰에도 초겨울이 내려앉았다. 백 년씩은 족히 넘겼음직한 굵은 소나무들이 의연하게 푸른 솔잎을 달고 있다. 그 소나무들 숲에 전통 기와집 <솔미가>가 반듯하게 자리잡았다. 너른 안마당과 툇마루에 그득 찬 햇살이 길손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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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닷컴]더덕구이와 각종 반찬들
경주 한우 등심에 집된장 육수로 만든 불고기
고교시절 경주는 부동의 수학여행지였다. 처음으로 남부지방을 여행하는 사춘기 소년의 가슴은 꽤나 설렜다. 그러나 유쾌하지 않은 추억도 있다. 취침 전 담임 선생님에게 단체로 몽둥이 찜질을 당했던 것과 여관에서 차려준 밥이 너무 형편없어 몇 끼를 굶었던 일이 그랬다. 단무지처럼 생긴 염장 무와 거지가 먹다 버린 듯한 찬밥이 묵은 때가 낀 낡은 상에 올라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밥상을 차렸던 여관 주인의 정신 세계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 뒤로 한동안 경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국사도 석굴암도 일출도 아닌 그 밥상이었다. 다른 유명 관광지들처럼 지금도 경주에는 음식 뛰어난 식당을 꼽기가 쉽지 않다. 상주 인구보다 외지 여행객이 많은 관광지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솔미가>의 존재는 반갑다. 우선 주인장인 정명화 씨 부부의 밝은 인상이 무척 푸근하다. 웃을 때는 마치 얼굴무늬 수막새 기와에 새겨진 신라의 미소를 대하는 듯하다. 차분한 자세와 웃음 띤 얼굴로 주문을 받고 고객을 응대하는 모습이 아주 편안하다. 고풍스런 전통 한옥 기와집인 이 집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이 집의 간판 메뉴는 옛 한우 불고기다. 솔가불고기밥상(150g 2만원)과 미가불고기밥상(150g 1만5000원), 두 가지가 있다. 경주 인근에서 자란 한우의 채끝이나 등심을 쓴다. 특히 솔가불고기는 1등급 한우를 사용했다. 채 썬 파,
팽이버섯, 넓적당면과 함께 채끝이나 등심 부위를 사용, 불고기로서는 드물게 육질이 묵직하게 씹힌다.
불고기 맛은 육수가 좌우한다. 이 집은 독특하게 불고기 육수을 낼 때 집된장을 넣었다. 된장과 함께 육수를 만들 때 양파, 대파, 무, 다시마 같은 채소를 아주 넉넉하게 넣는다. 이때 따뜻한 기운이 돌게 하기 위해 생강과 계피도 약간씩 첨가한다. 육수 내는 과정에서 염도가 높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쓴다. 가족 단위 손님이 많은 이 집 특성상 어린이들이 짜게 먹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함께 차려낸 음식과 반찬도 맛깔스럽다. 곁들임 음식으로 잡채, 묵, 샐러드가 나온다. 찬류로는 요즘 한창 맛이 든 깍두기, 멸치볶음, 꼬시래기 무침, 백김치가 주로 나온다. 여기에 주꾸미나 그 밖의 반찬들이 제철에 맞게 교대로 번갈아 나온다. 이 중 눈여겨봐야 할 반찬이 백김치다. 고소하고 달큼한 배추에 시원하고 담백하면서도 깔끔한 백김치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백김치에 불고기를 싸서 먹으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불고기는 백김치를, 백김치는 불고기 맛을 서로서로 치켜세운다. 식물성 맛과 동물성 맛이 합일되는 오묘한 맛의 세계다.
더덕구이 향기, 솔바람 향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단체로 식사를 할 때 가끔 한 두 명이 그 집의 메인 메뉴를 선호하지 않아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이 집에선 불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손님을 위해 더덕구이밥상(100g 1만5000원)을 마련했다. 더덕구이에 된장찌개와 오리훈제고기, 밑반찬으로 구성했다.
핵심 식재료인 더덕은 오래 보관하기 어려워 관리가 쉽지 않다. 주인장 정씨가 국내 최상품 더덕을 물색한 끝에 강원도 평창군의 평창더덕영농조합에서 생산한 4년근 더덕을 쓴다. 참기름을 살짝 넣고 구운 더덕에서는 진한 더덕 향이 고소한 기름내와 더불어 입맛을 자극한다.
함께 떠먹는 된장찌개는 정씨 부모님이 직접 담근 것과 시중의 된장을 섞어서 끓였다. 구수한 시골 맛과 너무 짜지 않게 시중의 된장을 반반씩 섞은 것이다. 여기에 청양고추를 넣어 얼큰한 맛을 곁들였다. 더덕에 바른 고추장 역시 된장과 함께 정씨 부모님이 직접 담근 것을 사용, 한결 맛의 여운이 길고 깊다. 불고기도 그렇지만 더덕구이 한 점에 술이 빠질 수 없다. 맥주나 소주도 좋지만 화랑(1만원) 한 잔을 곁들이면 더덕 향내를 더 깊게 음미할 수 있다.
널찍한 한옥 기와집 방 안에서 정다운 사람들과 느긋하게 밥 한끼 먹는 일이 행복일 수도 있음을 느낀다. 창호지로 들어오는 햇빛과 서까래와 중방, 대들보의 나무 색깔들이 밥을 먹는 동안 눈맛을 즐겁게 해준다. 이 집 둘레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다. 후원에는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 바람이 불면 푸른 솔 숲 사이로 부는 솔바람 소리가 청아하다. 그 바람 맞으면 한겨울에도 백김치 국물 마신 듯 가슴이 시원하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 솔숲을 거닐면 복잡했던 머리 속이 명징해진다. 얼굴을 스쳐가는 상큼한 바람, 어쩌면 노송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나와의 인연을 향해 우주의 맨 끝에서 수천 년을 달려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솔미가> 경북 경주시 신평동 441-1 (054)748-8087
기고= 글 이정훈, 사진 임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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